산리즈카의 외침 - 누구도 땅에서 나가라 할 수 없다.

 활동이야기/군환경       2006. 5. 29. 21:21  l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나리타 공항 건설에 반대한 일본 농민들의 투쟁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국가의 일방주의에 맞서 아직도 활주로 옆에서 농사지으며 권리 주장


평택의 저항과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점점 더 공권력에 의존하려는 기세다. ‘미군기지 이전’이라는 국책사업에 농민들의 터전을 쉽게 내줘야만 하는가. 여기 이웃 일본의 현대사를 관통한 하나의 사건이 있다. 전후 일본의 사회갈등 중 가장 대표적인 이슈이자 운동으로 꼽히는 ‘산리즈카’(三里塚)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평택의 투쟁과 여러모로 비슷해 평택 사태의 해법에 몇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경찰 사망, 농민 자살로 위기 상황

도쿄에 가본 한국인이라면 나리타 국제공항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공항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흘린 농민들의 무수한 피와 눈물의 역사까지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산리즈카 투쟁은 나리타공항 건설에 저항했던 산리즈카 지역 농민들의 저항의 역사다. 산리즈카는 도쿄도 옆에 있는 지바현 나리타시의 농촌이었다.

[imgcenter|060529_001.jpg|550|▲ 과거 투쟁 때의 사진들. 사진제공 : 산리즈카시바야마연합공항반대동맹|0|1]
나라타공항에서 비행기가 이착륙할 때 보이는 활주로 바로 옆의 녹지로 펼쳐진 넓은 동네다. 이 농촌 마을에 1966년 6월22일 일본 정부는 신국제공항건설계획을 발표한다. 이후 40년간 지속된 산리즈카 투쟁은 전후 일본 사회운동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1960년대 중반 베트남전 군수기지였던 일본에는 군사 공항이 필요했다. 1951년 개항한 하네다공항은 110만㎡의 면적으로 지금의 나리타공항과 비교하면 9분의 1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항공 수효가 급격히 많아진 일본 정부는 새로운 국제공항 건설을 모색했고, 그 대상지가 산리즈카였다. 원래 이곳은 일왕의 황실목장이었다. 목장 옆의 황무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해 농사를 짓게 했지만, 땅이 척박해 농민들은 보통 20여 년 이상 개간해야 농토로 쓸 수 있었다고 한다. 평택 대추리처럼 산리즈카 지역의 농민들도 갖은 고생을 통해 농토를 얻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논리를 앞세워 일방적으로 공항 건설을 발표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농민들은 저항했던 것이다. 손과 발이 쟁기처럼 단단해지도록 고생해서 ‘신토불이’가 되었는데, 정부가 어느 날 갑자기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 땅에서 나가주시오’라고 한 셈이다.

당시 일본은 도쿄올림픽(1964)을 통해 국가적 자신감을 회복하고 신칸센 건설을 기점으로 고도성장에 불을 댕겼다. 이런 분위기에 전쟁 특수까지 겹쳤으니 관료들의 눈에 농민이 들어올 리 없었다. 농민들은 공항 터 선정 사실도 TV를 통해 알게 됐다. 당시 청년으로 산리즈카 투쟁에 가담했던 나카무라 히데야시는 “농촌이지만 먹고살 만했기 때문에 굳이 보상금에 연연해하지는 않았다”면서 “그나마 정부는 초기에는 보상금도 거론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투쟁이 전국화하면서 전학련에서 전공투로 이어지는 학생운동 진영, 진보사회운동 진영도 가세했다. 지역주민은 소년선봉대와 노인선봉대까지 조직했다. 1967년부터 운수성이 측량을 위해 마을에 진입했고, 이후 경시청의 기동대를 앞세워 불도저로 공사가 강행됐다. 수많은 부상자와 구속자가 나오면서 비극적인 상황도 생겨났다. 1971년 9월16일 제2차 행정대집행 때 5천여 명의 기동대가 농민과 학생 등의 사수대를 몰아붙이는 과정에서 경찰관 3명이 죽은 것이다.

이 사건으로 정부 대응은 강력해졌다. 계엄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또 다른 불상사도 잇따랐다. 당시 23살로 농사를 짓던 산노미아 후미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78년 3월26일에는 농민들과 운동단체들이 연대해 개항을 코앞에 둔 신공항의 관제탑을 점거했다. 현장에서 160명이 연행되고 17명은 감옥으로 갔다. 1991년 운수성과 농민들은 14년 만에 원탁회의를 열었다.

[imgcenter|060529_002.JPG|550|▲ 산리즈카 마을 입구에 걸려 있는 투쟁구호 안내판|0|1]
15회를 걸쳐 이뤄진 이 회의는 나리타공항 건설에서 제기된 모든 문제를 검토했다. 토론회가 이어지면서 터 결정 과정에서 운수성과 농림성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농림성은 농민의 의견 수렴을 제안했지만, 운수성은 국책사업을 명분으로 반대했다는 것이다. 1993년 5월 운수성은 처음으로 농민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1993년 원탁회의가 한 번 더 열렸다. 1995년 무라야마 총리는 개인적으로 산리스카 주민들에게 사과했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음을 견디며

투쟁의 와중에서 일본 정부는 1978년 제1활주로를 중심으로 공항 운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9년 뒤인 1986년에 제2활주로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제2활주로는 아직도 반토막짜리 활주로로 국제선이 아닌 일부 국내선 기종만 이용되고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국제공항의 한쪽 활주로가 반토막인 것이다. 당초 2개의 국제선 활주로를 계획했지만, 단 세 가구의 농민들 때문에 1개의 활주로는 국제선을 접었다. 세 집의 농민들이 일본 정부의 토지 수용에 불응해 끝까지 버텼기 때문이다. 한국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세 가구 때문에 국가를 대표하는 국제공항의 활주로가 제 기능을 못한다고 하면 보수언론과 기득권층이 어떻게 대응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강제집행 아니면 돈다발로 보상’, 둘 중 하나를 강요하며 여론몰이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선택은 조금 달랐다. 일본인들은 보통 국가정책에 충실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후 민주주의 투쟁 역사에서 가장 예외적이고 치열했던 산리즈카 투쟁은 이런 일본에 대한 통념을 한꺼번에 뒤집었다.

시마무라 지, 아쓰타비치 등 농민들은 활주로 바로 옆의 땅에서 여전히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경시청 소속의 사찰형사들이 주변을 지키는 상황에서 농민들은 하루 수십 번 오가는 국내선 비행기의 바로 50m 아래 100dB에 가까운 소음 속에서도 자신의 땅의 권리를 지켜가고 있다. 주민 아쓰바라는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내가 여기에 계속 사는 한 공항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며 강경한 뜻을 보였다. 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음과 땅의 진동이 느껴지지만 결코 이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소음과 진동이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람은 물론 농작물도 제대로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까지 드는 지역이지만, 이들은 정부의 사죄가 있어도 이주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가겠다는 태도다.

[imgcenter|060529_003.JPG|550|▲ 산리즈카 투쟁으로 청춘을 다 보낸 하기와라 나리타시 의원. 그는 “이 투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알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0|1]
산리즈카 투쟁이 40년을 이어온 것은 땅을 하늘로 아는 농민의 끈질긴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소음 위협으로 이들을 몰아내려 하기도 했다는 게 주민들의 증언이다. 제2활주로의 주변 지역에서는 지상에서 40m 상공에 제트기를 띄워 한편으로 위협하며, 또 한편으로 보상책에 동의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활주로 근처 지역 주민인 겐타로는 “잠정 활주로의 개항 뒤에 있었던 정부의 반인권적 행태를 전국적으로 알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주민 다카오는 공항 쪽의 횡포를 고발했다. “제트기가 출발 전에 의도적으로 북쪽을 향해 이륙 엔진을 걸 때가 있는데, 그때의 배기가스와 소음이 대단하다. 배기구가 집 쪽을 향하기 때문에 배기가스의 타는 냄새 같은 것이 코를 찌른다. 특히 여름에는 그 냄새가 절정을 이룬다. 특히 소음이 절정일 때의 수십 초는 텔레비전 소리도 들리지 않고, 대화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나의 밭과 집, 생활의 기반이 있는 이곳에서 나갈 생각은 전혀 없다.”


“전쟁에 이용되는 공항 반대한다”

현재 산리즈카 북쪽 지역인 덴지미네에서는 지속적으로 집회가 열리고 있다. 농민뿐만 아니라 국철노동조합과 다른 지역 공항 주변 주민 대표까지 연대해 투쟁에 힘을 모으고 있다. 농민들이 제2국제선 활주로의 북쪽 확장 공사에 반대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공항이 전쟁에 이용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이라크에 자위대를 파병하고 물자를 보내는 데 이용하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뜻도 담고 있다.

산리즈카 투쟁은 일본 시민사회에도 유래가 없는 일을 만들어냈다. 1978년 일본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신공항 관제탑 점거농성으로 구속됐던 활동가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벌금을 모금을 통해 해결한 것이다. 운수성과 나리타공항공단 쪽은 점거농성 참가자들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고, 법원은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농성자들이 중심이 되어 벌인 모금운동이 결실을 맺어 지난해 11월11일 보상금 전액인 1억300만엔을 운수성에 납부한 것이다. 이 일은 를 비롯한 주요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imgcenter|060529_004.JPG|550||0|1]
[imgcenter|060529_005.JPG|550|▲ 농민 세 가구의 집 위로는 밤중에도 국내선 비행기가 이착륙한다. 주민들은 제트기가 의도적으로 소음을 낸다고 항의하고 있다.|0|1]

[imgcenter|060529_006.JPG|550|▲ 남아있는 농민들은 여전히 활주로 옆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0|1]
산리즈카 투쟁은 고도성장기 일본 사회의 내적 갈등을 총체적으로 표출한 현안이었다. 국가와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농민들의 터전을 쉽게 생각한 관료주의에 대한 농민들의 치열했던 저항의 기록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농민들의 삶과 역사, 문화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농토, 즉 땅에 대한 정주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일본도 2천 년 이상 농경사회를 이어온 전통이 있다. 국가의 일방주의가 농민들과 충돌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전형적인 사건이 바로 산리즈카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평택에서 견지해야 할 관점도 이 투쟁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 국가의 논리와 가치가 어떤 것이라도 5천 년 농경문화를 이어왔던 정체성을 손쉽게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을 평택 농민들은 몸으로 말하고 있다. 농민들에게 보상금을 제시하며 ‘땅에서 당장 나가달라’고 하는 건 5천 년 역사와 문화의 기초를 보상금과 맞바꾸자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토지수용의 강제측량을 위한 말뚝을 박을 수는 있어도, 땅을 향한 우리의 마음에는 말뚝을 박을 수는 없다.” 산리즈카 투쟁이 격렬했을 때 나온 구호 가운데 하나다



글 : 녹색연합 활동가 서재철 kioygh@greenkorea.org

* 이 글은 한겨레21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