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새로운 역사로 되살리는 사람들

 활동이야기/군환경       2007. 3. 30. 15:24  l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오키나와 역사와 미군기지 기행

지난 2월 22일부터 27일까지 일본 남쪽 지방인 오키나와 역사 기행을 다녀왔다. 이번 기행을 통해 청정한 바다와 휴양지로 알아온 오키나와의 숨겨진 역사를 배웠다. 오키나와 평화 운동가들은 사람들 기억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지난 2005년 한.중.일 함께 쓰는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주목한 역사의 한 쪽이 있었다. 1945년 오키나와에서 미국과 일본이 격돌한 오키나와 전쟁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일본 본토로 진격하기 전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국과 본토 진격을 무슨 수로든 막기 위한 일본과의 전쟁 중 민간인 희생자는 8만명이었다.

[img|okinawa-cave.JPG|580|▲ 오키나와 전쟁 당시 주민들이 집단자결한 치리치비 동굴|0|3]
[img|okinawa-name.JPG|580|▲ 오키나와의 군의원인 치바나 쇼이치 씨|0|3]

오키나와 중부의 요미탄의 지방의원인 치바나 쇼이치씨는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서 오키나와 전쟁 당시 사람들이 집단 자결한 동굴이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다른 지방으로 떠난 이들은 그 동굴에 관한 아픈 기억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고도 했다. 치바나 쇼이치는 숨겨진 동굴을 찾아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전쟁을 피해 80여명의 사람들이 동굴로 숨어들었고 일본군이 미군에 밀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한번도 미국인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람들은 정부가 교육한 대로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남자들은 죽임을 당한다’는 공포에 떨게 된다. 치욕스런 죽음보다는 자결하는 것이 낫다며 갓난 아이까지 죽이고 말았다. 일본 정부는 ‘집단 자결’이라며 성스럽게 칭하지만 치바나 쇼이치씨는 이 주민들을 죽인 것은 결국 일본 정부의 제국주의적 교육과 홍보라고 주장한다. 서로가 서로를 죽였던 이 오키나와 전쟁은 45년 8월 2차 대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잊혀졌던 전쟁이다.

그 이유는 오키나와가 일본 사회에서 가지는 복잡한 의미 때문이다. 본래 류큐 왕국으로 중국과의 무역을 하면서 번성하던 오키나와는 1800년대 말 일본 사치마 번의 침략 이후 일본에 편입되었다. 일본은 오키나와를 편입시켰지만 중국과 무역을 통해 이룬 오키나와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몇 년에 한 번씩 중국 사신이 오키나와를 방문할 때는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에 편입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오키나와 왕이 오키나와 방식으로 사신을 대접하는 이중생활을 하기도 했다.


오키나와 전쟁에서 이긴 미국은 1972년까지 이곳을 점령하게 되고 일본을 포함한 태평양 지역의 중요한 거점을 위해 곳곳에 미군기지를 세워 나갔다. 주민들은 수용소에 몇 개월동안 감금되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보니 미군기지가 세워진 그곳은 이미 그들의 고향이 아니었다. 집이 사라진 그들은 그래도 예전에 살던 곳에서 가까이 살고 싶어 미군기지 주변에 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72년 미국과 일본은 미-일 안보조약을 통해 오키나와를 일본으로 반환하기로 한다. 반환은 미국과 일본에 서로 다른 속내를 보여주는 것인데, 일본은 일본 본토의 미군기지를 오키나와로 이전하기 위해, 미국은 점점 거세지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미군기지 반대 운동에 대한 책임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미군기지 건설과 사용에 대한 인정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히려 일본으로 반환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본토의 미군기지가 줄어드는 것에 비해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확장되어 갔다.

주일 미군기지의 70%가 자리잡은 오키나와

[img|okinawa-gadena.JPG|580|▲ 가데나 기지 자료관에서 바라본 기지와 비행기 이륙장면. 소음때문에 난청환자가 발생하고 있다.|0|3]
[img|okinawa-gadena2.jpg|580|▲ 가데나 공군기지 자료실. 오키나와 지자체에서 세운 자료관으로 미군기지 안을 감시하는 카메라와 전투기|0|3]
[img|noise.JPG|580|▲ 후텐마 비행장이 있는 기노완시 기지청책부 담당자가 기지의 소음문제를 설명하고 있다|0|3]
현재 일본 국토의 0.6%에 지나지 않는 오키나와에는 주일미군기지의 70%가 자리잡고 있다. 동북아 최대 미군기지인 가데나 공군기지와 후텐마 미 해병대 기지 때문에 주민들 소음 피해가 계속되었고 주민들은 미국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오키나와에서는 평화 운동가뿐 아니라 지자체에서도 힘을 모아 오키나와에서 한국으로 이라크로 가는 미군의 전투기와 헬리콥터를 감시하면서 본래 이 땅은 주민들의 집과 농토가 있던 곳이라는 사실을 계속 되살리고 있다. 그래서 전쟁을 위한 기지가 아닌 생명을 위한 땅으로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키나와 사탕수수가 펼쳐졌던 곳에 있는 미군기지를 보면서 한 때 황금빛 들판이었던 황새울에서 끝까지 싸웠던 평택 대추리 주민들이 겹쳐졌다.
우리의 기억이 모여서 새로운 역사를 찾을 수 있다는 교훈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피해 입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한국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나.

글 : 녹색연합 녹색사회국 고이지선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