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공원이 되어가는 국토
화엄사 앞. 짓다 만 채 방치되었거나 멀쩡한 새 건물인데도 문을 닫은 대형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만고만한 민박집이나 식당을 빼고 호화스럽게 외형을 장식한 건물들의 풍경은 하나같이 을씨년스럽다. 어젯밤 지리산에서 터를 잡은 지 10년이 된 시인 이원규씨가 이런 풍경의 이유들을 말해 주었다. 10여년간 지리산 자락에 불어댄 관광개발 붐은 사람들에게 은행 융자를 얻어 건물을 올려 민박집에서 모텔로, 식당에서 회관으로 이름을 바꾸게 만들었다. 갑자기 관광객이 늘어난 것도 아닌데 하루가 멀다하고 생겨난 대형 식당이나 숙박업소들은 얼마 못가 부도를 내 버렸다. 시골마을에서 은행 빚 몇 억이 흔한 게 되어버렸다 한다. 대사찰 화엄사 앞 풍경은 씁쓸하기만 하다. 놀이공원에나 있는 바이킹 배를 싣고 가는 트럭이 순례단을 지나간다. 설마 화엄사 앞에? 관광개발 바람은 온 국토를 놀이공원으로, 위락단지로 만들어가고 있다. 지역의 건설토호세력들, 이권을 진 지자체의 배만 불리고 결국 주민들은 빚더미에, 국민들은 싸구려 관광에 내몰린다.
[img|060430_003.jpg|550|▲ 운조루 인근 마을에서 올해도 풍년을 기원하며 정성스레 모판을 만들고 있는 농민|0|1]
[img|060430_004.jpg|550|▲ 운조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녹색순례단|0|1]
섬진강,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 모습들
지리산 안으로 들어갔던 어제를 지나 오늘은 산 아래로 내려와 지리산과 함께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걸었다. 전라북도 진안군과 장수군의 경계인 팔공산 자락,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진안, 임실, 곡성을 지나 순천의 압록에서 보성강과 합쳐져 구례를 가로지르며 화개를 지나 하동으로, 광양만으로 흘러나간다. 세 개의 도와 열두 개의 군을 거쳐가는 우리나라에서 아홉 번째로 긴 강이다. 의례 강 주변엔 도시가 들어서기 마련이지만 섬진강은 고만고만한 들판과 산자락의 마을들에 닿아 있다.

산 사이 /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 가만히 있는 곳 /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하략)

시인 김용택이  ‘섬진강 15 - 겨울, 사랑의 편지’에서 그린 바로 그 풍경이다. 들판을 충분히 적셔 강가 사람들을 풍요롭진 않아도 넉넉히 삶을 이어가게 했다. 섬진강으로 향하는 길, 지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집 앞 담을 따라 나 있는 수로로 연결하고 다시 논으로 이어지게 하여 강으로 흐르게 하는 알뜰함을 만나고 보리와 밀이 익어가는 들판을 만나고 정성스럽게 모판을 만드는 농부들을 만난다. 차를 타고 지나갔다면 만나지 못했을,  섬진강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풍경을 하나하나 마음에 담는다. 강둑의 바람과 순례단의 발걸음과 강물의 흐름이 어느덧 하나가 되어 강건너 우리를 보는 이들에게 기분좋은 풍경이 될 거라는 생각도 해 본다.
섬진강에 다리가 놓여지고 나선 이제는 강가의 풍경처럼 놓여만 있던 줄배가 오랜만에 순례단을 태우고 강을 오가며 제몫을 한다. 줄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교통수단이었을 것이다. 줄배로 강을 건너는 그 모습이 오래오래 남아 있길 바란다.
[img|060430_008.jpg|550|▲ 강가의 풍경처럼 놓여만 있던 줄배가 오랜만에 순례단을 태우고 강을 오가며 제몫을 한다.|0|1]
19번 국도, 길로 남아 있어야 한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19번 국도와 861번 지방도가 나 있다. 변변한 이동통로도 없이 산과 강은 이미 두 개의 도로로 경계가 나뉘어져 있어 숲과 강을 오가는 동물이 차에 치여 죽는 ‘로드킬’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지금은 그나마 도로가 굽어 있어 차들의 속도가 60km/h 정도지만, 앞으로는 더 자주 로드킬이 발견될지 모른다. 2차선인 19번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img|060430_007.jpg|550|▲ 로드킬 - 861번 지방도를 달리는 차에 치인 새 |0|1]
[img|060430_006.jpg|550|▲ 19번 국도에서 바라본 861번 지방도를 걷는 녹색순례단|0|1]
동물만 문제가 아니다. 19번 국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 사람들이 19번 국도를 도로라 부르지 않고 길이라 부르는 이유는 많다. 봄이면 벚꽃으로 하늘을 가렸다가 이어 꽃잎이 날릴 때가 되면 봄 속의 따뜻한 눈맞이로 길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아름다운 기억 한자락을 심어놓는 길. 도시에선 만나기 힘든 강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을 흥얼거리게 하는 길. 몇 해전 우리의 역사와 문화, 자연을 다시 보는 눈을 길러 주었던 지금의 문화재청 유홍준 청장이 꼽았다던 바로 그 길이 19번 국도다.
4차선 확장공사의 이유는 벚꽃축제 기간의 정체를 해소하고 광양만 경제자유구역의 원할한 물류이동을 위해서다. 그러나 4차선 공사가 진행된다면 벚꽃나무들은 상당수 위치를 옮기거나 사라질 것이다. 벚꽃나무가 사라진 벚꽃축제라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그렇지만 일년에 며칠동안 집중된 축제기간동안에만 벌어지는 정체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도로를 확장한다면 전국에 있는 모든 도로가 확장되어야 한다. 전주와 광양을 잇는 고속도로도 이미 착공중이라 물류이동 운운은 말할 필요도 없다.

[img|060430_001.jpg|550|▲ 순례 셋째날 순례단의 여정은 사람의 보행이 불가능하게 만들어진 차도를 걸어야 하는 일정으로 시작된다.|0|1]

19번 국도 확장은 섬진강에 지정된 수달보호구역이나 지리산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한 그 모든 노력을 한낱 말장난으로 만들어 버린다. 속도가 빨라지면 예전엔 잠시라도 쉬어가며 국수 한그릇이라도 말아먹고 가던 이 곳이 결국 통과하는 곳이 되어버려 지역주민들의 경제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재 19번 국도 확장공사는 지역의 환경단체들과 주민들의 반대로 일단은 주춤한 상태다. “모든 도로가 차를 빨리 가게 하는 것이 목적일 필요는 없으며 천천히 가는 것이 좋은 도로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한 건설교통부 장관의 이례적인 발언에 희망을 걸어 본다.

아이들이 있어 행복한 연곡분교
섬진강을 건너 피아골로 접어든다. 피아골은 옛날 이곳에서 곡식의 하나인 ‘피’를 많이 재배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지만 요즘 사람들에겐 빨치산의 아지트였던 이 곳에서 빨치산과 토벌대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 골짜기 깊숙이 들어가도 계곡의 폭은 좀처럼 좁아지지 않는다. 산비탈을 따라 계단식 밭들이 보인다. 강 옆의 평지를 두고 이 곳에 들어와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고달픈 역사는 지리산일대가 전란에 휩싸였던 50년대나 그 이전 구한말, 그리고 임진왜란까지도 거슬러 올라가 저 산비탈 밭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요즘 만들어지는 계단식 밭은 산비탈에 돌로 축대를 쌓아가며 밭을 만들던 옛방식이 아니다. 산비탈의 숲을 없앤 그 자리에 바로 씨를 뿌려 놓은 지금의 방식은 비가 오면 모조리 흘러내릴 것만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다.
[img|060430_009.jpg|550|▲ 비가 오면 모조리 흘러내릴 것만 같은 요즘의 계단식 밭의 모습|0|1]
[img|060430_010.jpg|550|▲ 폐교의 위기에 처한 학교를 선생님과 주민들이 다시 살려낸 피아골 안 연곡분교|0|1]
피아골 안 연곡분교가 오늘 순례단의 잠자리다. 몇 해 전 폐교직전 까지 갔던 학교를 선생님과 주민들이 다시 살려냈다. 연곡천의 맑은 물소리를 듣고 지리산을 뒷산으로 여기며 자라는 아이들의 행복한 작은학교의 모습이 흐뭇하기만 하다. 순례단의 잠자리 부탁에 ‘교과서에까지 나오는 훌륭한 일을 하는 단체’로 녹색연합을 기억하며 흔쾌히 학교에서 머물게 해 준 선생님과 아이들을 위해 순례단은 떠나기전부터 아이들의 도서실을 채울 책을 모아 왔다. 교육에까지 들어간 경제논리는 학생수가 적은 곳은 폐교방침을 세우고 있다. 마을에서 학교가 사라지면 아이들이 사라지고 그래서 자식들의 교육을 걱정하는 젊은이들은 더 이상 시골마을에서 살 수 없게 된다. 귀농을 생각하는 많은 이들을 주춤하게 하는 이유도 바로 학교다. 체험교육이라며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일을 적극 권장하는 교육정책과 자연 한가운데에서 이미  ‘체험’하며 배우고 있는 아이들에게서 학교를 빼앗는 교육정책이 함께 있는 모순을 발견한다.

길에서 길을 묻다
오래된 돌담에 마음을 기대고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나누며 새와 곤충, 벌레 하나하나를 눈여겨볼 수 있었던 오늘 하루는 우리가 걷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걷고 있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사람들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지리산과 섬진강이 훼손되는 모습들이 들어오고 개발의 모순이 파고들지 않은 곳 없는 이땅 곳곳이 내게 상처로 다가온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베풀어준 자연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녹색순례 3일째. 걸어온 길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다.
[img|060430_005.jpg|550|▲ 순례단의 발을 지켜준 양말과 등산화도 잠시 휴식을 취한다.|0|1]

* 글 : 지리산 녹색순례 홍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