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순례 셋째날] 원형 그대로 보전되어 있는 옛길, ‘울진에 있다!’

 녹색순례/2009년       2009. 5. 14. 10:16  l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탁 트인 곳에서도 그 흔한 전봇대, 송전탑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자연에 폭 안긴 듯하다. 녹색이 이처럼 다채로울 수 있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숲이다. 깊은 산 속에서 흘러 내려온 깨끗한 개울만이 시야에 들어온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개울물을 떠 마셨다. 더없이 맑고 깨끗했다. 수백 년 전 보부상들도 산을 넘으며 이 물을 먹었을 것이다. 산을 넘으며 보부상이 다녔던 대표적인 옛길, 울진의 ‘십이령(十二嶺)길’이다.

[img|090513-1.JPG|600|▲ 울진 북면 두천리에서 서면 소광리로 넘어가는 십이령 길. 이 옛길은 낙동정맥을 중심으로 동서의 삶을 이어주고 서로 다른 문화와 관습을 소통시켜 주는 관문이었다.|0|1]

순례단은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서 출발해 십이령길을 따라 울진 서면 소광리까지 40리, 약 16km 걸었다. 옛길엔 졸참, 당단풍, 쪽동백, 신갈, 소나무 등이 어우러지며 숲에 넓고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고, 햇살은 숲 그늘에 양보하듯 은은히 길을 비췄다. 숲 속 깊숙이 들어가자 바람소리가 마치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깊은 바람에 가슴 속까지 시원했다.

[imgright|090513-4.JPG|250|▲ 울진문화원 주보원 선생이 십이령을 넘던 현령이 이곳에 잠시 쉬어 간 것을 기념하여 만든 현령은공불망비를 설명하고 있다. 산새가 험하여 말도 탈 수 없던 현령은 걸어서 울진에 부임해야했다.|0|1]길은 가파른 비탈이라도 지그재그로 오르자 수직으로 오르는 것에 비해 한결 힘이 덜 들었다. 6시간 이상을 걸었음에도 조금 쉬었다 일어나면 20대 초반의 여성도, 60대 남성도 기력을 금방 회복했다. 그리고 콘크리트 대신 길을 덮은 두터운 낙엽은 순례단의 발목을 부드럽게 감싸고 어루만졌다. 순간, 이렇게 아름답고 따뜻한 길이 이젠 이곳 울진 깊숙한 곳에서만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보부상의 작품, 간고등어!
울진은 동쪽으로 동해와 접하고, 서쪽과 남쪽은 낙동정맥의 높은 산세에 가로막혀 있다. 때문에 이 지역은 조선후기부터 보부상이 타 지역과 경제적 교류를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다니며 동서(東西)지역을 연결했다. 울진장에서 미역, 생선 등 해산물과 소금을 구매하여 봉화장 등에 유통시키고 대신 곡식, 의류, 약품, 잡화 등을 물물교환하여 되돌아왔다.
보부상은 먼 거리를 이동할 경우, 생선과 같이 부패하기 쉬운 상품은 소금간을 해서 운반했다. 울진에서 잡은 고등어를 소금간에 절여 안동에 도착하면 가장 맛이 좋은 상태가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안동의 간고등어다. 보부상들이 주로 이용한 12개의 고개를 통칭하여 ‘십이령길’이라고 하는데, 원형 그대로 보전되어 있는 옛길로는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다.  

][imgleft|090513-2.JPG|250|▲ 두천리 옛길 초입에 있는 내성행상불망비. 울진과 봉화를 오가던 보부상들이 그들의 최고 지위자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0|1] 보부상들이 십이령을 넘어 봉화장에 도착하는 데는 꼬박 3일이 걸렸다. 때문에 울진의 흥부에서 출발한 보부상은 바릿재에 오르기 직전에 있는 두천리에서 일단 하루를 머물 수밖에 없었다. 두천1리에서 바릿재로 올라가는 입구에서는 보부상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유적이 있다. ‘내성행상불망비(乃城行商不忘碑)’다.
이 비는 1890년경 보부상들이 접장(우두머리) 정한조와 반수(셈을 대신 해주던 사람) 권재만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철(鐵)로 만들어진 이 비(碑)는 당시 울진지역 상품의 유통경로와 장시(場市)의 이해에 상당한 도움을 주는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옛길은 내성행상불망비에서 바릿재, 샛재, 너삼밭재, 너불한재로 이어진다. 이 중 샛재는 동서를 횡으로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내성행상불망비를 지나 본격적으로 보부상들이 걸었던 십이령 옛길로 들어섰다. 숲으로 들어서자 들꽃과 어우러진 소박한 길이 순례단을 반긴다. 하늘에 걸린 나무들로 만들어진 터널을 걷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의 터널을 지나는 듯하다.

두천리 일대는 보부상들이 많이 머물면서 주막과 마방(馬房)이 번성했다. 그래서 옛길 곳곳에서는 예전 주막이 있던 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터에는 집 마당에 주로 심는 감나무, 신나무, 뽕나무 등이 자라고 있었고 벽이었을 석축(石築)이 남아 있다. 주막은 1950년 6.25전쟁 이전까지 활발히 운영되다 보부상들의 활동이 끊어지면서 없어졌다. 이후 이곳에 화전민이 농사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바릿재와 지하에서 찬물이 나온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찬물내기’를 지나 샛재에 도달하자 성황당(城隍堂)이 나타났다. 옛길 중간 중간에는 무사안녕과 소원성취를 기원하기 위해 보부상들이 만든 성황당이 남아 있다. 그 중 샛재는 그 형태가 가장 잘 보전되어 있으며 보부상들이 직접 관리할 만큼 의미가 크다. 성황당은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을 모신 신당(神堂)으로 보통 원뿔 모양으로 쌓은 돌무더기와 마을에서 신성시되는 나무(神樹) 또는 장승으로 이루어진다.
샛재의 성황당 안에는 사람 이름이 열거된 판(版)이 걸려 있고 보부상들이 술을 올렸음직한 제기(祭器)들이 놓여 있었다. 울진문화원 연구위원인 주보원(73세) 씨는 “성황당 안에 남아있는 이름은 성황당을 짓는데 누가 돈을 냈고, 감독과 수리는 각각 누가 했는지 등에 대해 기록한 명단”이라고 말했다.

[img|090513-3.JPG|600|▲ 보부상들의 무사안녕과 부귀영화를 기리던 성황당. 십이령 길 중 동서를 잇는 통로였던 샛재에 있다.|0|1]

마지막 남은 옛길의 원형   
옛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서 길을 만들었다. 마을과 마을을 이은 길은 서로 소통하게 하고, 양쪽 지역 모두의 경제를 활발하게 만들었다. 또한 무수히 많이 자리잡은 작은 마을을 잇느라 거미줄처럼 복잡했지만 야생동물과 숲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2007년, 문경새재 등 4개의 옛길을 국가지정 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했다. 그 역사적, 민속적, 학술적 가치에 대한 인정이다.

[img|090513-5.JPG|600|▲ 하나하나 쌓아올린 돌담의 흔적이 남아있는 옛길. 이 길을 오가며 걸었던 옛 사람들의 손길이 느껴진다.|0|1]
[img|090513-6.JPG|600|▲ 콘크리트 대신 두꺼운 낙엽으로 덮혀 있는 옛길. |0|1]
옛길은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들면 고스란히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땅에 이러한 옛길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남아 있는 옛길도 대부분 그 바로 옆에 고속도로나 국도가 뚫려 있다. 하나의 고개를 정점으로 두 지역이 오가는 옛길의 원형이 남아 있는 곳은 한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 십이령의 굽이굽이 옛길은 이 땅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길의 원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