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자유롭게 흘러라” 여주 남한강을 다녀와서

 활동이야기/4대강현장       2009. 6. 22. 16:00  l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산 아래를 휘도는 남한강이 수차례 범람하면서 만들어진 넓디넓은 모래벌판과 샛강. 멸종위기 야생동식물들이 살아가는 끝없는 늪지가 펼쳐진 곳. 지역주민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내셔널트러스트 보전대상지역에 선정되었지만, 한반도 대운하와 4대강 정비사업이라는 토목 공사에 위협받고 있는 그 곳. 지난 6월 13일 시민들과 함께 그 끝을 알 수 없는 원시적 습지를 굽이굽이 걸으며 습지생태계의 가치와 보전에 대해 고민하고 왔습니다.

‘홍수가 나서 만들어진 평야야. 그래서 범.람.원.’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서 지형 부분에서는 매번 고전한다. 그림으로 그리고, 모형으로 만들고, 온갖 것들을 총 동원해야만 아이들은 지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간신히 이해한다. 특히 하천 중․하류에서 만들어지는 범람원 부분은 아이들이 많이 어려워하는 부분 중 하나이다. 아이들은 ‘홍수’라는 것은 우리의 재산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홍수로 지형이 바뀔 수 있고, 홍수로 평야가 생길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 고개를 갸우뚱 하곤 한다. 사실 나도 범람원에 대해 전문가처럼 자신 있게 수업을 했지만, 직접 두 발로 범람원을 걸어본 적이 없어 범람원의 형성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녹색연합 답사 공지가 나왔을 때 냉큼 신청을 하게 되었다.

남한강 답사는 남한강교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은 영동고속국도가 확장되며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다리라고 한다. 다리에 서서 상류 쪽을 바라보았다. 제방이 쌓여있지 않아 자유롭게 흐르는 남한강 옆으로 연초록빛 우거진 수풀이 보인다. 하천이 범람하면서 상류에서 떠내려온 흙과 자갈이 쌓여 만들어진 곳이다. 꽉 막힌 둑 안을 흐르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필요한 적절한 범위를 가진 채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은 자유로워 보였다.

[imgleft|20090622_001.jpg|350| |0|0]다리 아래에서 점심을 먹고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다. 하천에 의해 오랜 시간 매끄럽게 다듬어진 자갈들이 발 아래에서 부드럽게 구른다. 우리가 걷는 길 옆으로 단면이 드러난 곳에는 둥근 자갈이 겹겹이 쌓여있어 이곳이 오랜 시간 동안 하천에 의해 퇴적되어 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걷다 보니 중간에 강과 연결되는 통로 같은 것이 있고 그 통로와 연결된 곳에 습지가 있었다. 범람원은 다소 고도가 높은 자연제방과 홍수가 나면 강물이 밀려들어가는 고도가 낮은 배후습지로 이루어져 있다. 말로만 듣던 배후습지를 직접 봐서 마음이 설렜다. 남한강의 습지 중 몇몇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골재를 채취하고 난 후 만들어진 웅덩이에 홍수 시 하천의 물이 들어가 습지가 된 것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홍수 때 이곳으로 강물이 밀려들어와 스스로의 높이를 조절한다는 생각을 하니 신기하기만 했다.  

주변 사람들과 웃고 이야기하며 한참 걷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신발을 벗으라고 하셨다. 어색한 자세로 신발을 벗고 한 발 내딛는데, 어라, 꽤나 느낌이 괜찮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파고드는 느낌, 간질간질 하면서도 폭신한 느낌이 등산화를 신고 걷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내 발은 편안해했지만 혹시나 발이 찔리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자꾸 발이 오그라들고 걷는 속도는 느려졌다. 이렇게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면서도 마음을 졸이다니, 사람들이 강물에 둑을 쌓고, 동물을 가두고, 산을 깎아내어 없애버리는 마음 한 구석에는 자연에 자기를 내맡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래밭을 지난 후에는 자갈밭이 펼쳐졌다. 자갈과 자갈 사이의 작은 틈에서 이름 모를 풀들이 빼곡히 자라나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우리가 밟고 지나가는 풀 중에 멸종위기종이 있다고 하셔서 이리저리 마구 풀을 밟던 발바닥에 식은땀이 났다. 멸종 위기 종은 솔잎국화의 일종인 단양쑥부쟁이라는 풀인데, 단양에서 자라던 이 풀이 단양이 수몰되고 난 후 남한강을 따라 흘러와 여주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자갈 사이가 척박한 곳이다 보니 다른 식물들이 잘 자라지 않기에 그 틈에서 단양쑥부쟁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예로부터 조상들은 강을 통해 이동하며 생활권을 만들어왔고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는데, 식물도 하천을 통해 번식하고 이동해 나간다니 하천이라는 것은 생명이 통하는 통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천에 둑을 쌓고 하천을 막는다는 것은 결국은 생명의 흐름을 막아 모두를 죽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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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습지를 걷다가 굴암리 부근에서 고개를 가로질러 나와 남한강, 섬강, 청미천이 합쳐지는 삼합리 인근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5명이 타면 깊게 가라앉는 조그만 배를 타고 남한강을 통통 건너 또다시 도리 부근의 범람원을 걷기 시작한다. 이곳은 남한강과 섬강과 청미천이 합쳐지는 곳이다. 지류가 본류와 만나는 곳에서는 홍수 때 본류가 역류하며 지류를 따라 넓게 범람원을 형성한다. 그래서인지 도리 부근의 범람원은 유독 크기가 크고 뚜렷했다.

[imgright|20090622_003.jpg|350| |0|0]이 길을 걸을 때 이런 지리적인 관찰을 한 것도 좋았지만, 사람들과 함께 교감을 나눈 것이 너무나 좋았다. 그 길에서 우리는 ‘자주꽃 피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꽃 피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라는 가사를 가진 ‘감자꽃’ 노래를 배워서 불렀다. 혼자 부르던 노래가 둘, 셋, 넷, 다섯이 부르는 노래가 되며 약간은 어색했던 사람들 마음이 열려나가는 듯 했다. 감자꽃 노래가 끝나면 버드나무 피리를 입에 물고 ‘뿌-’하는 소리를 내며 함께 깔깔 거리며 웃었고 버드나무 피리 합창이 지겨워질 때면 갈대를 꺾어 바람개비를 만드는 법을 부산스럽게 배웠다. 노래를 부르며 신발을 벗고 살랑이는 강물과 모래를 발로 느끼며 걷다보니 어느새 해는 붉게 지고 있었다. 드넓은 모래사장 위를 우리는 제각기 자기의 속도대로, 그러나 함께, 마음과 모래 위에 발자국을 깊이 남기며 걸어내었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갔다.

다음 날 아침 아침을 든든히 먹고 아홉구비 등산을 시작하였다. 아홉구비는 아홉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해서 아홉구비라고 부른다고 한다. 강 옆에 바짝 붙은 산지를 따라 걷는 거라 그런지 길이 험하고 구불구불하다. 이 길을 쭉 따라 내려가면 여주를 지나 양평에서 북한강과 만나 하남을 지나 서울로 흘러들게다. 답사를 다닌답시고 몇 번씩이나 차를 타고 지나다녔던 길이고, 심지어 3년 전 혼자 스쿠터 여행을 할 때 지나쳐갔던 길임에도 불구하고 이 길이 너무나 낯설다. 멀리서 바라보는 산의 모습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산의 모습이 다르듯이 몇 시간 안에 국토를 가로지르는 자동차를 타고 바라보는 시선과 한발짝 걸으면서 바라보는 시선은 너무나 다르다. 속도를 사랑하고 속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아마 남한강변 사이의 숨어있는 바위늪구비도, 아홉구비도, 청미천 모래톱도, 그리고 청미천에 사는 고라니도 모를 것이다. 보이지 않아 없는 줄만 알 것이다. 빠르게 달려 주변은 보이지 않으니 더 빨리 가고 싶다는 자기 마음만 보여 그렇게 길을 뚫고 산을 파헤치고 싶어하는게 아닐까? 아홉구비의 아홉 고개를 헐떡이며 넘으며 걸음의 속도 뿐 아니라 내 삶의 속도를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우리의 일정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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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측정과 관찰을 위한 답사가 아닌, 함께 걷고 함께 웃고 함께 공유하는 1박 2일을 보내서일까? 남한강 구비에서 ‘4대강 삽질을 멈춰라.’ 종이를 들고 사진을 찍을 때 마음 깊은 곳이 뜨거워져왔다. 강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과 동물과 풀의 목소리를 들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롭게 흘러서 행복하다는 남한강의 마음을 들어서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발이라는 이름하에 사라진 수많은 ‘지.못.미. 지형’들처럼 이곳도 사라지게 놔두지 않을 거다. 학교에 돌아가면 내가 걸은 범람원에 대해 애정을 담뿍 담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찍어온 사진을 보여주며 아이들에게 범람원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얼마나 생명력 넘치는 곳인지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범람원에 대해 말하다 보면 그것들을 지켜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글 : 이수영 (녹색연합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