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평화공원을 가다

 활동이야기/DMZ·접경지역       2009. 5. 8. 09:27  l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남북관계가 쉽지 않다. MB정부 등장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된 데다 지난달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를 정점으로 긴장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연일 계속되는 비무장지대(DMZ)에서의 군사도발 가능성 보도가 그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개성공단으로 대표되는 남북경협사업도 앞으로의 향방을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DMZ 주변에서는 정부와 지자체의 ‘평화’라는 이름의 많은 사업이 진행 중이다. 경기도는 지난해 ‘DMZ일원 평화생태공원조성 연구’에 이어 올해 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강원도는 지난달 22일 철원 민통선 지역에서 ‘평화문화광장’ 기공식을 치렀다. 인제의 ‘DMZ 생명평화동산’과 고성의 ‘DMZ 박물관’을 연계해 DMZ 일원의 평화생태 관광 상품을 개발, 국제적으로 DMZ 관광활성화를 도모해 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환경부와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안전부를 비롯해 기업들도 DMZ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안보가 제일의 기치로 여겨지던 냉전의 공간이 평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현상적으로는 반가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평화'라는 이름 아래 어떠한 의미와 내용이 담겨 있는지는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보다 먼저 평화를 고민했던 일본 히로시마시를 찾았다. 1945년 8월 6일,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 시 중심부 약 580m 상공에서 작열했다. 히로시마 시는 일순간 초토화되어 건물의 90% 이상이 불타거나 파괴되었고, 1945년 12월 말을 기준으로 약 14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그러나 65년이 지난 지금 히로시마 시는 무척이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모습이어서 그 날의 무시무시한 충격과 공포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imgcenter|20090508_01.jpg|600|▲ 히로시마 평화공원 전경. 히로시마 중심 번화가였던 이 지역은 폭심지로부터 500m 이내의 근거리에 위치해 원폭투하로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지금은 매년 수백만 명의 시민과 관광객이 평화공원을 찾고 있다. 평화공원 안에는 평화기념자료관, 원폭 사망자 위령비, 원폭 돔, 원폭희생자 추모기념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0|0]



[imgcenter|20090508_02.jpg|600|▲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전경. 8월 6일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과 인공물,  원폭투하 전후 히로시마의 역사와 재건모습 등이 상세하게 전시되어 있다. |0|0]



[imgleft|20090508_03.jpg|260|▲ 공원 중심에 위치한 ‘히로시마 원폭 사망자 위령비’와 한글현판.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이념을 잘 나타내고 있다. |0|0]군사도시였던 히로시마가 피폭 후 핵무기 전폐와 세계평화를 주창하는데 앞장서게 된 데는 시민들의 역할이 중심이 되었다. 1949년, 일본 최초로 진행된 주민투표 결과, 90% 이상의 찬성으로 히로시마 시는『히로시마 평화기념 도시건설법』제정을 정부에 요청했고, 법 제정을 계기로, 평화기념시설 설립이 추진되었다. 어찌 생각하면 떠올리기 싫은 참담한 과거이건만, 역사를 기억하고 전수하기 위한 시민의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1955년 평화기념자료관 건립이후 자원활동단체였던 ‘원폭물품수집 지원연합’을 중심으로 히로시마의 시민들은 원폭과 관련된 물품들을 수집하는데 힘을 모았다. 지금도 평화공원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시민 자원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원폭생존자 38명을 포함해 200여 명의 시민들이 자료관과 공원에서 해설사로 자원활동을 하고 있다. 매년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학교와 기업의 자원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지역사회의 꾸준한 관심과 참여가 평화공원을 더 활기차게 하고 있다.

  

1949년에 제정된『히로시마 평화기념 도시건설법』제1조는 ‘미래의 평화를 실현하려고 하는 이념의 상징으로서 히로시마시를 건설한다’고 밝히고 있다. 1945년 8월 6일 이후 계속된 고난의 나날은 피폭자들에게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파괴, 숱한 죽음, 피폭에 따른 신체장애, 후장애에 대한 불안 등, 시민들은 무수한 기억과 후유증에 괴로워하면서도 이 체험을 전하며 핵무기 근절과 세계평화를 호소하고 있다. 지구상의 핵무기가 사라질 때까지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평화의 불은 평화공원의 이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성 민통선 안에 국비와 도비 456억 원을 들여 건설된 ‘DMZ 박물관’이 완공된 지 넉 달이 지나도록 개관을 못하고 있다. 전시품을 제대로 수집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주객이 전도된 형국이다. 먼저 DMZ에 대해 무엇을 말할 것인지 폭넓은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무엇보다 ‘평화’를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며, 이 세대와 다음세대에게 무엇을 전달할 것인지 깊이 고민해 볼 일이다.




[imgcenter|20090508_04.jpg|600|▲ 평화기념자료관에 전시된 원폭투하 당시 전시물품. 폭발 시 멈춰버린 시계와 원폭으로 인한 피해의 참상이 전시되어 있다. |0|0]





『원폭 돔(the Hiroshima Peace Memorial(Genbaku Dome)』보전을 위한 시민운동



『원폭 돔』의 세계유산 등록 운동을 통해 히로시마 시민들의 평화에 대한 염원과 역사 보전노력을 엿볼 수 있다.

원폭 돔은 폭심지로부터 160m 근거리에서 피폭당하여 폭풍과 열선에 대파되었으나 건물의 중심부는 기적적으로 붕괴를 면했다. 피폭 전 관공서였던 건물 꼭대기의 둥근 잔해를 본 시민들은 이를『원폭 돔』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에 이 건물을 ‘기념으로 남기자’는 의견과 ‘위험 건조물이고 피폭의 비참함을 생각나게 하므로 부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건물의 풍화가 심해져 소규모 낙석이 발생하자 보존하자는 의견이 커졌다.

1966년 이후 보존을 위한 두 차례 모금활동이 진행되었다. 인류공통의 평화 상징의 의미로 전 세계적으로 모금 활동을 벌인 결과, 4억 3,000만 엔이 넘는 성금이 모였다. 핵무기의 무서움을 말해주는 증인으로, 나아가 평화의 상징으로 영구히 보전하자는 의견이 모아져 1992년, 히로시마 지역전체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후 1995년 정부에 의해 추천되어 1996년 12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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