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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령 고개를 넘고 춘향터널을 지났다. 이제 곧 남원인가보다. 태양은 버스 위에서 단단히 내리쬔다. 남원시외버스터미널 맞은편 그늘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길게 앉아 있다. 그곳에서 운봉행 버스에 대해 간단히 여쭈려다 도착하는 버스가 그 버스임을 눈치채고 바로 탄다. 작은 남원이었지만 그곳을 빠져나가니 곧 시원한 바람이 몰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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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겠다고, 갈거라고, 가보고 싶다던 지리산 길, 이제야 걷는다. 지리산 길은 제주올레와 더불어 우리나라 걷기 여행의 선두지라 할 수 있는 곳. 세계적인 걷기 열풍을 조금 뒤늦게나마 받아 만들기 시작한 이 길. 여행자들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특징, ‘걷기’를 이곳에서 충분히 즐길 것이다.
운봉에 내렸다. 거리는 한산했지만 신비한 기분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곳은 지리산의 ‘정기’를 듬뿍 받은 것이 분명하다. 나의 모교들이 몽땅 ‘금정산’의 정기를 받았듯 말이다. 지리산줄기가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전에는 저 높은 산의 정수리를 따라 걸었다. 지금은 그의 발 아래 주변을 걷는다. 내가 남긴 상처, 시린 정수리가 치유되길 바라면서.
집에서 인쇄한 지도를 보고 방향을 잡는다. ‘10km 전 구간이 제방길과 임도로...’ 라는 설명을 보니 강을 따라가나 보다. 가져간 GPS에 표시된 강까지는 꽤나 걸어야 했다. 도중에 만난 다른 여행자로부터 이 구간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서림공원’이 ‘저기’라는 것을 알아냈다. 제방길이다. 둑방길이라고 해야할까. 어릴 적 낙동강 둑을 따라 걷던 기억이 났다. 지금은 자전거 도로와 인도로 덮여진 그곳도 원래는 이런 흙길이었다.
뒤편에서는 뜨거운 태양이 대지를 말리느라 나의 몸도 데웠지만, 앞 쪽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몰아쳤다. 오랜만에 펼쳐진 푸른 하늘과 새하얀 구름들은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들었다. 이런 기분은 그 길을 걷는 다른 여행자들도 마찬가지인 듯. 자연스레 노래가 흐른다. 머릿속에서 시작된 노래자락은 이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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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8월이지만 둑방길 좌우로 코스모스가 흔들린다. 가을=코스모스 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입 밖으로 나오던 노래는 이승환의 ‘흑백영화처럼’이라는 노래로 바뀌어버렸다. 노래의 시작이 ‘코스모스가 많이도 핀 가을날 우리 다시 만나자는...’ 이기 때문이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10년 전부터 코스모스를 볼 때면 으레 이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인지 가을과 코스모스, 흑백영화처럼과 노래를 부르던 당시의 느낌은 서로 섞여버렸다.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 때 그 때의 추억과 느낌들은 중첩되어 가슴을 울렸다. 이 길을 걷는 지금도 마찬가지. 훈련소 시절 행군하며 불렀던 것과 자전거 여행하며 불렀던 것이 가장 진하게 남아있다. 결국 그 때의 영상들이 둑방길과 오버랩 돼버렸다. 나의 눈은 이런 때 가장 쉽게 젖는다. 코도 시큰거린다.
비전마을 입구, 거대한 나무들이 몇그루 버티고 있다. 몇몇 여행자들, 영감님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서 말을 걸어볼까 하다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싶어 눈인사를 나누고서 지나친다. 나무 아래에는 나무로 된 평상이 넓게 만들어져 있다. 가방을 팽개치곤 누웠다. 바람은 초록빛의 나뭇잎, 푸른하늘을 뒤섞는다. 그리고 사라락 사라락 하는 소리와 어디론가부터 향기도 가져다주었다. 눈을 감는다.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볕이 눈꺼풀을 간지는 듯 흔들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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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방길은 골이 깊어진 곳에서 산길로 이어졌다. 국가에서 산림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임도’다. 길은 거대한 댐을 지나치고 톱으로 난도질당한 숲을 지났다. ‘난도질’에 대해 좋은 점들을 큰 간판에 적어놨지만 나에겐 통하지 않는다. 자연은 자연스러울 때가 가장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좋은 숲’은 ‘돈’을 많이 만들어내는 곳이고, 내가 말하는 ‘좋은 숲’은 다양한 생명체가 더불어 사는 곳이다. 두뇌가 쓰라렸지만 다행히 이 길은 길지 않았다.
짧은 숲 속의 길을 지나 이내 평길로 접어들었다. 마을의 중심에는 노인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몇몇 분과 눈이 마주쳐 꾸벅 인사를 하고는 지나친다. 인월로 들어가는 다리 앞, 아주머니 세분이 ‘학생~’하며 나를 불러 세운다. ‘이쪽’인지 ‘저쪽’인지 헷갈린다는 것. 얼굴엔 웃음으로 가득했다. 길을 가르쳐 드리고 내 갈 길로 나섰지만 다시 부른다. 사진을 찍어달란다. 저쪽 편 길가에 노란 꽃들이 늘어섰길래 저쪽 가서 찍자하니 우리가 꽃이니 그럴 필요가 없단다. 하하. 맞다.
도심의 찌든 공기를 마시며 걷는 것은 고통이지만, 자연 속에서 걷는 것은 그 자체로 즐겁다. 노래를 부르게 만들고, 시원함을 가져다 주고, 즐거운 기억들과 슬펐던 기억들을 무작위로 떠올리게 해준다.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다양한 감정 속에서 걷게 된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 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느림’속에서 이런 느낌이 더욱 더 강하다는 것. ‘빠름’ 속에서 감정이라는 것은 대개 배제되기 마련 아닌가. 요즘 세상 각박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감정이 메말랐다는 것, ‘느림’이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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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성만 (녹색연합 자연생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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