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10년의 기록 - 어떡할래? 같이 할래?

 활동이야기/환경일반       2003. 10. 9. 12:44  l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1명이든 100명이든 좋습니다. 녹색연합과 참가자들은 새만금 생명과 함께 할 것입니다.”새만금-새희망을 찾는 생물상 모니터링을 할 시민을 모집한다는 절절한 안내문 맨 마지막 줄이 이렇게 끝나는 겁니다. 이 말이 제겐 이렇게 들리지요. “니가 관심을 갖든 안 갖든 우리는 무조건 한다. 그러니 어떡할래? 같이 할래?” 다른 분들에겐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이 말이 무섭더이다. 보아하니 별 뚜렷한 계획안도 없는 듯한데 달마다 한 번, 10년을 하겠다는 배짱과 뚝심이 무섭더이다.

[img:saeman_10y_02.jpg,align=left,width=300,height=225,vspace=5,hspace=10,border=1]개천절로 시작하는 3일 연휴라 이곳 저곳 당기는 데가 많았지만 다 떨치고 3,4일 이틀은 어느 산골짝에서 가만히 쉬고, 일요일에 1시까지 부안 계화도 입구에 딱 모이라니 아침 일찍 버스를 탄다고 탔습니다. 수없이 고속버스를 타고 전국을 헤매고 다녀봤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 시골 마을버스도 아니고 고속버스가 고장났다 하여 할 수 없이 다음 버스를 기다려 40분만에 바꿔 탔지요. 몇 달 전 중국을 헤매고 다닐 때 하도 기상천외한 일들을 당해 봐서인지 옛날 같으면 안달복달 화를 참느라 끙끙댈 일이 지금은 그냥 그런가부다 하고 말게 되네요.

계화도는 여덟 달만에 옵니다. 새만금 간척 반대로 물들었던 부안의 모든 벽과 플래카드는 이제 핵폐기장 반대의 노란 물결로 넘실대고 있습니다. 싸움이 그치지 않는 땅, 눈물이 그치지 않는 땅, 이 땅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싸움이 증오가 되지 않기를, 눈물이 희망의 씨앗이 되기를. 나는 그들 앞에서 차마 말하지 못하는 그 기도를 마음 속으로 되뇝니다.

[img:saeman_10y_01.jpg,align=left,width=300,height=225,vspace=5,hspace=10,border=1]해양연구원의 강성길 박사님 가족과 이곳 저곳에서 모인 이들과 부안에서 터잡고 사는 녹색연합의 옛 활동가 지아가, 그의 백일 된 딸래미 ‘하나’까지 열 두어 명이 모였습니다. 회색의 넓은 들판이 끝없이 드러나 있습니다. 오후 햇살을 받은 개흙이, 그 흙을 주워 먹으러 구멍에서 나온 게들이 반짝입니다. 장화를 준비한 사람은 장화를 신고, 저같이 말 안 듣는 사람들은 맨발로 바다이기도 뭍이기도 한 땅, 게와 조개와 고둥과 지렁이와 망둥어와 미생물과 새들의 영토, 7천년 전부터 거기 있었고 지금도 거기 있는 그 땅을 걸어갑니다.


새만금 간척사업을 시작한 뒤로 조차가 작아지고 바닷물의 흐름도 약해져 더 많은 개흙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바닷물이 머무는 시간에 따라 개흙의 종류가 달라지고 또한 살 수 있는 생물도 달라진다는데 이렇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예전에 성했다는 양식장은 흙더미에 덮여 폐허가 된 지 오래고, 물속의 유기물을 먹고 살던 조개들은 흙이 많아져 입이 막혀 집단으로 무덤을 이루었고, 계화도에 유독 많이 나서 ‘계화조개’라 불리던 하얗고 좁다란 조개는 이제 계화도에서조차 보기가 어렵습니다.

[img:saeman_10y_03.jpg,align=left,width=300,height=225,vspace=5,hspace=10,border=1]그래도 살아있는 조개와 고둥과 개 들은 새끼를 낳았습니다. 서해비단고둥 새끼는 바닷물이 고인 데마다 바닥을 비단으로 깔아논 듯 어깨를 맞대어 옹알대고, 조그만 집거미보다도 작은 콩게들은 뭣이 바쁜지 바글바글 갯벌을 돌아다니고, 갯벌의 하이에나 왕좁쌀고둥은 뭐 죽은 녀석들 없나 하고 입을 쭉 내밀고 사사삭 기어다닙니다. 백합은 예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줄었다지만 물이 흐르는 곳 근처에서는 조금만 흙을 긁어도 백합이 얼굴을 쑥 내밀곤 했습니다. 그래요, 이 녀석들이 이렇게 살고 있었군요.
아직 모니터링 순서나, 모니터링 내용이 명확히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하다가 희망을 찾기는커녕 절망에 빠질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길 끝에 희망의 깃발이 꽂혀있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건 아니지요. 새만금만 생각하면 참담해지는 그 끝자리에서 이제 희망을 보려는 마음을 품은 것, 그것이 이미 희망입니다.

나는 10년을 함께 하겠다는 약속의 무게가 부담스러워 ‘한치 앞도 못 내다보는데 다음달에 갈지 못 갈지 낸들 알겠소’ 하고 얼버무렸습니다. 새만금을, 이 지구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연민을 가진 당신들과 녹색연합이 이 일을 끝내 해내겠지요. 어쩌면 나도 함께 말이죠.

글 : 이혜영